1931년 개성에서 태어나 20대 초반까지는 신여성으로, 40살까지는 가정주부로, 40대부터는 죽을 때까지는 ‘작가’로 살았던 박완서. 2009년 78세의 할머니였던 그는 명랑하고 귀여운 할머니의 삶을 즐기며 어느 곳에서든 따뜻함을 찾아냈습니다.
할머니가 되어도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작가 박완서의 일요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경기 구리시 아치울마을에 노란 집을 짓고 살아요. 태어난 곳은 개성의 시골 마을 초가집이었죠. 결혼하고서는 서울의 한옥에서 아이들을 주렁주렁 낳으며 살았고, 작가가 되어서는 도심의 아파트에서 이웃들과 복닥대며도 살아봤죠.
1998년. 그러니까 70이 다 되어서야 내가 살고 싶은 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어 살게 된 거예요. 아담하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3층 주택인데 외벽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따뜻한 노란색을 칠했어요.
1층에는 글을 쓰는 작업실이 있고 사람들과 만나는 응접실이 있어요. 거실에 해가 깊이 들어와서 저절로 손님 대접이 됩니다. 마당도 크지 않지만 직접 심은 나무와 풀, 꽃들이 계절마다 만발해 가꾸는 기쁨을 줘요.
이 집에서 ‘아주 오래된 농담’과 ‘그 남자네 집’을 썼어요. 수많은 단편 소설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죠.
작가라고 종일 글에만 파묻혀 있는 건 아니에요. 아침부터 아, 이걸 써야겠다! 하고 벌떡 일어나 바로 몰두하는 날도 있지만 요새는 여유롭게 해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하루를 살아내는 날도 즐깁니다.
남들이 보면 꽤 평범하게 살고 있구나 싶을 거예요. 대학생 손녀를 깨워서 밥을 먹고 학교에 보내고…아침에 일어나서 해뜨기 전까지 마당을 가꾸고 책도 많이 읽지요. 내가 하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분량을 생각하면 젊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노란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아무래도 마당이예요. 궁전 같은 서양 집들의 웅장한 정원들과는 사뭇 다른 멋이 있죠. 흙내가 나고 생명력 넘치는 나무와 꽃, 풀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삶의 공간이에요.
평생 농사를 해본 적도 없는데, 그래서 일까. 지금은 마당에서 흙을 주무르는 것 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호미를 정말 좋아하는데 호미에 대한 찬사를 글로 쓴 적이 있을 정도예요.
👩🌾 여성을 위한 최고의 농기구 호미
호미는 남성용 농기구는 아니다. 주로 여자들이 김을 맬 때 쓰는 도구이지만 만든 것은 대장장이니까 남자들의 작품일 터이나 고개를 살짝 비튼 것 같은 유려한 선과, 팔과 손아귀의 힘을 낭비 없이 날 끝으로 모으는 기능의 완벽한 조화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미적이다. 호미질을 할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하는 감탄을 새롭게 하곤 한다.
나의 정직한 노동과 땀으로 오롯이 일군 이 마당은 아주 명확한 ‘내 땅’이 되고 나는 ‘땅의 주인’이 됩니다. 그 뿌듯하고 편안한 마음을 모두 누려보셨으면 해요. 이 넓은 지구에서 마침내 찾아내고 탄생시킨 나만의 공간. 여기서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친구들과 전화 통화도 하고, 무얼 해도 충만해져요.
10년을 넘게 직접 심고 가꾼 꽃과 나무들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어요. 소나무에는 박경리 선생님과 얽힌 사연이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노란집에 처음 오시면서 하얀 봉투를 주셨는데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이 들어있었어요. 그 돈으로 나무를 심으라고 하셨죠. 그래서 저 우뚝 솟은 소나무가 이 마당을 사시사철 푸른 모습으로 지켜주게 된 거죠.
목백일홍은 마당 한 켠에 있던 걸 옮겨 심었어요. 지금은 꽃이 거의 다 지고 조금만 남아있는데, 아주 빨간 게 너무 예쁜 꽃을 피우고요. 저쪽에 있는 나무 수국은 겨울에 눈이 올 때도 꽃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게 근사해요. 나무 아래 퍼진 은방울꽃도 한 뿌리 사다가 심은 건데 이렇게나 널리 퍼져서 존재감을 과시하네요.
아치울 이웃들, 성당 친구들과도 즐거운 일들이 많아요. 먼 데서 친구와 찾아오면 함께 아차산을 산책하며 나눌 이야깃 거리들이 수도 없지요. 나와 함께 이 길을 걷는다면 이런 얘기를 해줄게요.
⛰️ 박완서처럼 가을 아차산 걷기
내가 있는 힘을 다해 세파와 문득문득 이 세상에 때어나길 참 잘했다고 믿게 해 준 향기로운 도취의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받아들여야 할 나이는 종교도 위안이 되지 않을 만큼 초라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애면글면 이룩했다고 믿어온 약간의 소유와 알량한 명예를 마른잎처럼 떨구지 못하는 한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보다 더 초라해지리라는 걸 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산길은 푹신푹신해진다. 늙을수록 예민해지는 건 뼈의 마디이다. 아무리 걷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해도 아스팔트나 보도블럭 위를 걸으면 무릎이나 발목이 거기 관절이 있다는 걸 즉시 알려오기 때문에 오래 걷는 걸 피하게 된다. 몸속의 장기나 관절이 그 존재를 알려오는 건 위험신호와 같은 거기 때문에 무심할 수 있을수록 좋다. 명치께에 위가 있다는 걸 의식하는 건 과식했을 때나 소화가 안 될 때문인 것처럼, 요즈음 산길은 등산화 없이 걸어도 전혀 관절에 부담이 안 될 정도로 흙길 위에 쌓인 낙엽의 탄력이 쾌적하다.
간밤에 가랑비라도 한차례 뿌린 날 아침의 산길은 탄력뿐 아니라 그 향기 또한 깊고 그윽하다. 낙엽은 가랑잎이 주지만 솔잎도 꽤 섞였다. 젖은 솔잎과 가랑잎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면 마치 고고하고 탈속한 인격에서 말없는 감회라도 받은 것처럼 정신의 정화 같은 걸 경험하게 된다. 설사 그게 순간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세속의 잡스러운 일상에는 이게 웬 떡이냐 싶게 귀한 선물이다. 바로 그런 게 산의 좋은 기가 아닌가 싶다.
아치울의 좋은 재료로 만든 먹거리들도 일품이죠. 나는 ‘아치울 큰마당’이라는 식당을 자주 가요. 직접 기른 제철 채소로 멋부리지 않고 편안한 음식을 차려주는 곳이죠. 까슬까슬한 호박잎에 된장을 싸서 먹으면 소화도 잘 되고 기분 더 좋아져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피천득 선생님과 만났는데 볼 때마다 ‘사람이 저렇게 늙을 수도 있구나’ 감탄해요. 나이와 상관 없이 소년처럼 천진난만한 사람이 있답니다. 나 역시 자신을 본질적으로 명랑한 사람이라고 여겨요. 늙어서도 그것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평생 이렇게 살 자신도 있죠.
언론과 인터뷰할 때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어떨까요?’ 라는 질문을 꽤 많이 받는데요. 젊은이들은 믿지 못할 수 있겠지만, 나이들어 좋은 점이 정말 많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왔어요.
-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글을 쓰는 날도 있고, 쓰지 않는 날도 있어요. 하지만 쓸 이야기가 없어지는 날은 없네요.
돈에 대한 욕심은 사라졌는데 아직 남아있는 욕심이 있다면 ‘이런 거 하나 더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나이가 들다보니 내 몸이 헌집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헌집이니까 언제 폭삭 내려앉을지도 모르죠. 뭘 쓰고 싶다는 욕심은 있는데, 여기저기가 예전같지 않아 항상 몸과 의논하게 됩니다.
하지만 몸은 늙어도 감각과 감수성은 늙지 않아요. 밤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저녁 늦게 컴퓨터 앞에 앉아 수필을 쓰다 잘 거예요. 내 나이 대의 작가들 중에는 아직도 만년필과 원고지에 집착하는 분들도 꽤 있지요. 하지만 나는 1990년 초부터 워드프로세서를 썼을 만큼 변화에 유연한 편인 것 같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경험하면서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어요.